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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아우구수티누스의 고백록' 자기성찰과 반성을 배우다.

by 정부자 2022. 2. 15.

1. 아우구수티누수 고백록 읽게 된 계기


아우구수티누스의 고백록은 루소의 <고백록>, 톨스토이 <고백록>과 함께 세계 3대 고백록이라고 한다. 이중 아우구수티누스의 고백록은 1600년이라는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최고의 인문 고전이다. 나도 이 책을 대학생 때 과제제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읽고 대충 써서 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나이 들고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왔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때로 인간들은 아무 고뇌 없이 본능으로만 사는 동물을 부러워한다. 동물은 사냥을 할 때 포만감을 느끼면 중단한다. 그러나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은 항상 그 이상을 원하고 기대하며 욕심과 집착을 부린다. 그렇게 긍정적인 것과 그릇된 욕심이 혼합된 상태에서 몸부림을 치던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를 만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렇다. 때로는 짐승보다 무모해 보이더라도 인간의 ‘성찰’이라는 속성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처럼 인간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자아성찰과 반성이 아닐까? 이 책은 그 경지를 잘 표현한다.

2. 아우구수티누수 고백록 요약


고백록이라는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깊은 사색이 담기기에 굉장히 철학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말고도 톨스토이와 루소 등 인류 역사상 많은 위인들이 고백록을 저술했다. 그러나 아우구수티누스의 고백록은 다른 이들의 내용과 약간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의 대화와 기도를 하는 영적 자서전이다. 이 책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마주 대하는 영혼의 역정을 살핀 회고가 꾸밈없이 녹아있다.
고백록의 1권부터 9권까지는 본인이 죄가 많은 죄인이라는 내용을 구구절절 표현한다. 그런데 단순히 죄를 지었던 행위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이 자리 잡은 죄의 '동기'를 성찰하면서 엄격히 반성하고 비판한다. 젊은 시절 출세만을 위해 가졌던 방탕한 생활, 마니교나 점성술에 미혹되었던 우상 숭배, 드디어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지도에 의해 기독교로 회심하기까지의 일을 스토리 텔링하고 있다. 이후 9권에서는 수도생활에 집중하려던 도중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겪게 되는 슬픔과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끝맺는다. 10권에서는 주교로서의 자기관찰·자기비판을 행한다. 마지막 세 권은 성서의 신·세계·시간·영원에 대해 명상하고, 시간론을 서술한다. 아우구수티누스는 정말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과거를 꾸미지 않고 그때의 감정, 절망감, 막막함과 부끄러움 등을 꾸밈없이 진솔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그런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으로 글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과거를 숨기거나 미화하는 것은 현재의 삶에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온다. 과거에 당당하지 못하면 현재도 비틀려서 미래마저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 것이다.
무엇보다 인류를 사로잡는 고백록을 쓰려면 정직하고 적나라하기만 한 것으로는 2% 부족하다. 고백록은 저자가 상기하고 있는 이야기와 삶이 흥미로워야 한다. 또한 그 내용이 인간의 보편적인 죄와 유혹, 필요, 소원, 좌절, 고통 등 삶 자체의 치열한 투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자기중심주의와 저자만의 지극히 사적인 관심에서 벗어나려면 그 궁극적인 주체는 ‘나’와 ‘창조주’와 만남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최고의 고백록에 이르려면 개인적인 내용과 성찰, 그리고 철학적이고도 지적인 내용이 융합되어야 한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관조하면서 인간 근원의 자질과 성품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그리고 여기에 이 인류 문명의 철학과 문화 또한 아우른다. 이처럼 이 위대한 고백록은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인간의 문제를 평이하게 다루면서도 성찰할 수 있는 힘과 깨달음을 준다.

아우구수티누스

3. 자기 성찰과 반성을 배우는 성숙한 인생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는 흘러 떠내려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발자국으로 분명하게 족적을 남기며 걸어온 길이다. 사람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마주 대할 담력이 없다. 마치 징그러운 그 무엇을 대하듯 속히 잊어버리는 것이 유익한 일인 것처럼 과거를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 그리고 그냥 일상을 살면서 감추고 막연하게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행복하고 매우 바람직한 것처럼 받아들이곤 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곧,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아상실의 시대니 뭐니 하면서 허무해하며 극도로 즐거움을 추구한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 모든 것이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때문인 양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이 송두리째 빼앗겨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싸구려 취급하며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과거만큼 자신이 누군가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은 없다. 어떤 일을 하였으며, 누구와 관계를 맺었고, 무엇을 이루었는가, 과거의 모든 행적은 반드시 현재라는 열매를 낳았기 때문이다. 어제 내가 간절히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꿈꾸던 ‘내일’은 바로 ‘오늘’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흙으로 돌아가기 전 이 모든 것을 알았기에 창조주에게 대화를 시도한 것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육체에 있는 신비로운 가시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그의 고백을 읽으면서 그와 동일하게 내 삶 속에서 교묘하게 나를 지배하는 가시와 죄의 근원에 의한 깊은 골짜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암흑의 골짜기를 반성과 성장으로 채웠다. 그리고 그것을 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아직은 그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한다. 이것은 혼자만의 기도가 아니다. 모든 인류의 심경을 고백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 바로 우리의 고백 즉,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고백을 했다. 이 책을 읽고 나 또한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최선을 다해 진실하게 보내기를 다짐한다. 후회가 더 압도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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